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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밤, 낯선 주인공 – 잊혀진 겨울 간식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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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면 거리 곳곳에서 연기를 피우며 익어가던 군밤 냄새.

그 따뜻하고 고소한 향기는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겨울의 풍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우리는 밤을 잊었습니다.

화려한 디저트와 자극적인 간식들 사이에서,

밤은 점점 더 조용한 자리에 물러나고 있습니다.

 

 

밤은 한때 우리 조상들에게 중요한 식량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가을철 밤 수확이 끝나면

그것을 저장해 겨울 내내 먹었습니다.

쌀이 귀하던 시절, 밤은 밥과 섞어 지어 먹기도 했고,

가난한 집에서는 밤죽을 끓여 허기를 달래기도 했습니다.

단순한 간식이 아닌, 생존의 한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특히 전쟁과 기근의 시대에는 밤이 더욱 빛났습니다.

저장성이 뛰어나고 열량이 높은 밤은

전시에 군량미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말린 밤가루는 오래 보관할 수 있어,

군인들의 배를 채우는 중요한 자원이 되었습니다.

지금처럼 포장식품이나 인스턴트가 없던 시절,

밤은 자연이 준 완전식품이었습니다.

 

 

유럽에서도 밤은 오랜 세월 동안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밤나무가 풍요를 상징했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밀을 재배할 수 없는 산간 지역에서

밤이 주식으로 사용되었고,

그로 인해 밤가루로 만든 빵과 국수가 지역 음식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남부의 마롱 글라세(marron glacé),

즉 설탕에 절인 밤 디저트는 귀족들의 고급 간식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밤은 점점 변두리로 밀려났습니다.

먹거리가 풍부해지고,

다양한 간식이 쏟아지면서

밤은 '옛날 음식'으로 분류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도시 생활에서는

밤을 굽는 문화 자체가 사라지다시피 했습니다.

군밤 장수의 모습도 더 이상 보기 힘들고,

아이들은 밤 대신 초콜릿이나 젤리를 찾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습니다.

아파트 단지의 작은 장터에서,

시장 구석의 구이 통에서,

때로는 식탁 위 정성껏 만든 밤조림 속에서

조용히 존재를 알립니다.

밤은 강하지 않지만 은근한 단맛과

포근한 식감으로 마음을 채워줍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깊은 온기를 품고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최근에는 건강식으로서 밤의 가치가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식이섬유가 풍부하고 지방이 적어 다이어트 간식으로도 인기이며,

천연 당분 덕분에 혈당 부담도 적습니다.

특히 노인층에서는 치아에 무리가 없고 포만감도 높아 사랑받고 있습니다.

 

밤은 이제, 잊혀진 겨울 간식이 아니라

다시 발견해야 할 자연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기억 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그 따뜻한 향기와 함께,

다시 한 번 밤을 삶 속으로 초대해보는 건 어떨까요.

 

오늘 마트에서 만난 밤 한 봉지,

혹은 시장에서 문득 보게 된 군밤 한 줌이 누군가에겐 추억이고,

또 누군가에겐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밤은 여전히, 겨울의 진짜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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